김활란이 친일파라고 단정 짓는 부류가 이상한 애덜이다.
이화대학이라는 교명은 1886년초 고종 황제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교육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경영하던 여학교에 하사한 이화학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이화라는 명칭은 당시 학당 근처에 흐드러지게 피곤 했던 배꽃의 이름을 땄다거나 이화정이라는 정자명을 딴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904년에는 교복을 입게 되었고, 1910년 이화는 대한민국 여성 교육 사상 최초로 대학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여성 고등교육의 효시이다.
1925년 종합대학교로 성장하려던 이화의 노력은 일제의 억압 정책으로 시련을 겪게 되었고, 전문학교로 격하되었다. 최초 졸업식은 1927년 3월 18일이다.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이화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1928년에야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폐기됨).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화는 신촌 캠퍼스로 이전하여 종합대학교로 향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920년대의 이화여전 졸업 사진
일제 강점기에 와서 두 번의 강제 개명을 당하여 1943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청년 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변경되었으며 1945년에는 이화라는 이름이 민족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하여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변경되기도 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존재하는 동안 일본인 졸업생은 없고 2명만 재학했던 것으로 알려질 만큼 민족적 색체가 짙은 학교였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혹은 숙명여자전문학교, 경성여자 사범학교는 일본인 학생이 입학하거나 졸업을 하였다. 일본인과 조선인 통틀어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신진순이 이화여자 전문학교 출신이며, 모윤숙과 조정숙, 이남덕, 고옥남이 경성제국대학 선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1945년 민족의 해방과 함께 이화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으며 이화전문대학교라는 이름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이화는 대한민국 대학 사상 최초로 종합 대학교의 꿈을 실현하였으며, 이화는 해방 직후 문교부 1호로 종합 대학교 인가를 받아 냈다.
1920년대의 이화여전 교수 김활란과 김필례
(김활란은 이화여전이 대학으로 승격한 뒤 초대 총장이었고, 김필례는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의 처제였다.)
이시기가 전반적으로 일제의 문화 통치 시작이다.
1936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해 친일 칼럼, 강연 논술활동을 하는 한편 1941년 창씨개명 후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칼럼, 강연, 학도병 독려 등 매우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이 당시 미국 시민권자라면 일본인도 못 건드림.)
1941년 창씨개명 후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칼럼, 강연, 학도병 독려 등 매우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고 하는데
일본도 기독교 탄압을 시작함으로 끝까지 남았던 침례교와 모든 교단을 강제 해산시킨다.
뭐 주기철 목사 언급 생략..
* 창씨 개명은 반강제적으므로 1910년도 이후모든 태어났던 한국인에게 적용된다.
1938.10. YMCA , YWCA 를 해산시키고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종속시킴
이건 일본의 허수아비 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