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겔과 키에르케고르에 있어 신앙의 본질(Uber das Wesen des Glaubens bei Hehel und Kierkegaard)
출처 : KCM - 컴퓨터 선교회
1. 머리말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 그리고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뒷받침한 주체에 대한 절대적 신념과 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근대 이후, 인간 사회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이제 이러한 현상이 보편화된 현대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이 우주에서 절대적이고 중심적인 위치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현대 인간은 "신과 같이 된"듯 보인다. 과학은 수 많은 근거없는 두려움을 없애 주었고, 계몽주위와 주체에 대한 신념은 진리의 장소를 인간의 순수주관에서 찾게 만들었다. 자연은 더 이상 영령이 깃든 생명체라기 보다, 인간의 생산과 소비를 위한 재료로 전락했으며, 전에는 신만이 할수있는 일이라 여겨졌던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도 인간의 역할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우주적인 시대에도 종교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말에 나타난 동서 냉전의 붕괴이후, 세계의 질서는 종교에 의해 구분되리라는 전망도 심심치 않게 주장되고 있다. 따라서 순수주관이라는 인간의 요소외에 신앙이라는 또 다른 요소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21세기를 향하는 현재에 있어, 인간 개개인 뿐 아니라, 인간의 전체세계를 전망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수 있겠다. 그리고 특히 종교다원주의가 논해지는 현재에 있어, 그 본질과 한계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여러종교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한평생 고민하고 실존적으로 신앙을 수행하려 했던 사상가인 키에르케고르를 중심으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신앙의 본질에 대한 고찰의 문제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고찰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보편적이기 보다는 당사자의 "주관적"인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경우 신앙은 신앙 당사자에게는 더 이상의 의심이 필요치 않은, 혹은 의심이 불가능한, 매우 구체적이고 자명한 "객관적 진리"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것은 수천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신앙의 형태로 전승된 모든 종교현상이 그것을 입증한다. 신앙이란 하나의 허구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사실적 사건으로서 구체적인 개인에 의해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이런 한에 있어 신앙의 현사실성 여부에 대하여 질문한다는 것은, 마치 공기중에서 공기를 찾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로서 드러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객관적 진리임을 주장하는 어떠한 신앙도,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 신앙자는 이러한 신앙의 주관적 성격에 대하여 "신앙 공동체"를 예로 들어 반박하기도 한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어떠한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각각의 공동체 구성원은 동일한 신앙의 대상과 내용, 그리고 형식을 지니며, 그를 통해 보편적인 상호전달과 이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떠한 하나의 공동체"안"이란 의미에서는 타당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때 주장되고 있는 "객관성"이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보편적 객관성"이 아니라, 그 공동체에 속하는 구성원에게만 전달될수 있는 객관성인 것이다. 따라서 더 큰 의미에서 보면 신앙의 객관성이란 이미 주관적으로 타당성과 실효성이 제한된 객관성이라고 볼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신앙이 갖는 이율 배반적인 딜레마라고 볼수 있다. 신앙은 신앙에 의해서만 객관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문제점은 토착화 논쟁, 혹은 종교다원주의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도 볼수 있다.
이외에도 신앙과 더불어 파생되는, 혹은 신앙자체가 갖는 또 다른 문제점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신앙인 스스로 생각하듯이 자신을 유신론자라고 부를수 있는 보편 타당한 척도가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얼핏 보기에 무신론자인가 혹은 유신론자인가 하는 문제는 쉽게 판가름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철학적으로 신의 주어와 술어에 대한 논쟁으로서, 아직까지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은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사를 통해, 혹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말해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은 인간과 함께 하는 신, 즉 역사(시간)에 개입하는 신이라고 주장된다. 그런데 이렇게 별 문제 없는 듯이 보여지는 두 주장 사이에는 심각한 틈이 놓여 있음을 알수 있다. 신이 전지 전능하다는 주장은 신이 자기 차이성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셸링은 신의 근거와 신의 실존이란 표현으로 구분하였으며, 이러한 차이의 근거를 넘쳐흐르는 사랑에서 보았던 것이다. 1) 그런데 이러한 두가지 상이한 주장은 철학사적으로 항상 대립해 왔거니와, 그러한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경우로서 우리는 플로틴(그리고 신비주의)과 포이에르바하(니이체)사이에서 볼수 있다. 이 양극단의 두 사상가 부류에 의하면 신의 자기 동일성과 자기 차이성은 서로 병존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엄격하게 배타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플로틴에 의하면 신이 어떠한 속성 - 그에 의하면 우연성 - 을 지닌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신이기를 그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머물며, 자기 자신을 향유할뿐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신의 행위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신에 대하여는 어떠한 술어적 표현도 불가능하며, 술어를 갖는 신은 이미 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플로틴적인 신에겐 "신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조차도 거부된다. 즉 신은 자신 안에 실족과 근거라는 차이로서 표현 될수 없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신이 신인 것은, 바로 신이 인간의 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신은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한에 있어서만 그 존재의미를 지니며, 그러한 신과 인간의 관계란 곧 신적 술어를 통해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모두 진지하게 따른다면, 신앙인들이 너무도 쉽게 이야기 하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구별은 그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듦을 알수 있다. 플로틴적인 신을 사유하는 자가 주장하는 주장하는 유신론자는 포이에르바하적인 사유자에겐 무신론자로, 또 그 반대로 포이에르바하적인 유신론자는 플로틴적인 사유자에 의해 무신론자로 평가 받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신앙의 극단적 신비주의와 극단적 형식주의의 갈등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신앙의 문제가 갖는 두 번째 딜레마라고 볼수 있다.
이와 더불어 신을 자연적인 신과 초자연적인 신 중 어떠한 형태로 볼 것인가 하는 점에 따라 신에 대한 인간적 신앙의 태도와 표현 역시 달라짐을 알수 있다. 신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이해, 혹은 경험은 한 민족 공동체를 둘러 싸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관계되어 전개된다. 우선 어떠한 민족 공동체가 어떠한 신을 자신들의 신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 그러한 신의 모습은 전적으로 그 민족 공동체의 삶의 모습과 유비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떠한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 그 민족 공동체에게 풍요한 수확과 안정감을 제공할 때,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굳이 그러한 자연을 초월하는 신으로 나타날 필연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신은 바로 풍성한 수확을 제공하는 자연의 지배자, 혹은 그러한 자연자체로서 인식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관계는 신인동형론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신은 자연적인 신의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척박한 자연과의, 삶과 죽음을 건 끝없는 투쟁의 역사를 지닌 민족 공동체에게 있어 자연이란 포악하고, 삶을 해치기를 즐기며, 따라서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그들이 찾게 되는 신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자연을 부정하는 신으로 나타나며, 이때 부정은 초월이란 형태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전적으로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러한 거대한 차이는 신앙의 태도에서도 나타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초자연적인 신에 대한 신앙인의 관계는 철저한 단절로서 나타나며, 이러한 질적인 무한한 차이는 종교적인 언어로는 "죄"로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는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구원 역시 신의 은혜로부터만 가능하며, 인간적 행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런데 서구 철학의 전통을 따르면, 이렇게 인간과 신의 무한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을 그들은 "이성"이라 불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 형이상학과 서구 신학에 의하면 신은 거의 대부분 감정이나 의지의 신이기 보다는 이성의 신으로서 파악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한에 있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잇는 유일한 끈은 이성으로 나타나게 되며, 이것은 기독교에서 로고스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반면에 자연적인 신을 받아들인 민족 공동체의 경우, 신은 자연적인 신으로서, 신과 인간 사이의 엄격하고도, 질적인 무한한 차이는 강조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신 역시 자연의 연속선에서 발견되고 체험되기 때문에, 이러한 신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는 좀더 자연적인 형태를 띄게 된다. 신앙인은 신을 찾기 위해 로고스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인간의 삶속에서 신에게 간구하고 그 대답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이러한 관계 여하에 따라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신과 제물을 받기를 원하는 신으로 구분되며, 이에 상응하게 인간의 신앙 모습도 말씀의 들음을 강조하든가, 혹은 실증적인 신적 체험을 강조하든가 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특히 한국의 기독교에서 제사문제로 첨예하게 나타난다. 즉 한국 기독교에서 제사의 문제는 자연적 신앙의 태도를 지닌 민족 공동체가 초자연적인 신과 만난데서 파생되는 필연적인 문제라고 볼수 있으며, 이것이 신앙이 갖는 세 번째 딜레마인 것이다.
이러한 두 입장은 비록 서로간의 거대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모두 신을 자연과의 관계(초월이든 내재든)속에서 파악한 점에서 일치한다. 이와 달리 어떠한 민족 공동체가 일정한 자연 환경속에 정착하지 못했을 때,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더 큰 삶의 문제가 자연보다는 역사에 놓여 질 때, 이때 신은 또 다른 모습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즉 이때 신앙인의 주관심은 신의 형상이라기 보다 - 물론 신의 형상에 대한 궁금함은 모든 신앙인의 공통적 관심사이긴 하지만, 그 관심이나 전제적 자명성에 비추어 볼 때 - 신의 역사함에 놓이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 경우 신은 특정한 형태의 신보다는 사건의 신으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신의 존재와 그 의미는 전적으로 신의 사건으로 집약되게 되며, 이러한 사건에 의해 역사와 시간은 비로서 성숙한 시간(파루시아)으로 드러나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문제점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사건과 시간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에 대한 상이한 입장들이다. 즉 시간은 신의 사건에 의해 성숙한 시간으로 의미를 갖지만, 그 시간은 영원한 시간이 아니라, 현상하는 시간속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은 또 다시 궁극적 사건에 의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문제점을 내포한다. 따라서 사건은 시간을 가능케 하는 시초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그 사건은 시간을 완성시키는 종말적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건과 시간의 변증법적인 긴장이 놓이게 되며, 따라서 사건에 강조점을 두는가, 혹은 시간에 강조점을 두는가에 따라, 이러한 신적인 사건에 상응하는 인간의 태도도 상이하게 된다. 즉 신적인 사건을 완성된 사건으로 볼 것인가 혹은 시간 안에서 사건에로의 비약으로 볼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입장으로 구분되게 된다. 첫 번째 경우 개체적인 인간의 의미는 단지 전체속의 계기에 불과할 뿐이며, 둘째 경우 인간과 신의 관계는 계기가 아니라, 결단의 관계, 즉 실존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두 입장은 특히 헤겔과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잘 대변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신앙이 갖는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한다.
3. 키에르케고르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찰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하게 된 것은, 키에르케고르란 사람의 독특함 외에,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서 우리는 당시를 지배했던 기성교회의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을 들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현재 우리사회에서도 찾아볼수 있는데, 그러한 모습의 특징은, 권위와 독단에 의해 역설적으로 신의 본래적인 존재의미가 부정된다는 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의 기성교회가 인간과 신 사이에 자신의 독단적 권위를 개입시킴으로써, 인간과 신의 본래적인 관계를 심각하게 격리시키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 첫 번째 문제점이라면, 두 번째 문제점은 신의 구원사만을 전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빚어지는 인간실존의 소외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점은 헤겔 철학에 의해 대변되었고,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에 대한 강한 반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헤겔과 키에르케고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헤겔이 전체를, 반면에 키에르케고르가 개체를 강조한 점에 놓여 있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철학적 방법론-전체로서의 방법론-에도 적용된다. 헤겔의 경우 방법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한 또 하나의 별개의 수단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내용 그 자체라고 볼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은 신 자신이 자신을 전개시켜 나가는 신의 자기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반면에 키에르케고르에 있어 방법은 사태에로 - 그의 경우 실존에로 -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방법은 실존에 의해 비로서 그 내용을 얻게 된다. 즉 헤겔의 경우 그의 방법론은 절대정신(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여정인 반면, 키에르케고르에 있어 방법론은 신에 이르기 위한 실존에의 여정인 것이다. 이를 통해 헤겔과 키에르케고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전체와 개체간의 문제라는 점은 분명해 진다. 그렇다면 이 두 경우에 있어 신앙의 본질은 어떠한 차이를 지니게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 가능성을 찾기 위해 우선 헤겔에 있어 신앙의 본질을 살펴 보기로 한다.
4. 절대정신의 실현으로서의 신앙(헤겔)
4.1. 종교와 철학의 관계
헤겔의 종교철학에 있어 그 대상은 신 자신이며, 그 목적은 신을 인식하는데 놓여 있다. 종교에 대한 의식의 학문으로서 그의 종교철학은 신과의 연관성을 추구하며, 그것은 곧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추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헤겔의 입장은 신과 인간이 어떠한 일정한 방식을 통해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무한에 대한 그의 파악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무한이 무한이기 위해서 그것은 유한에 대립되어 있는 무한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무한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무한이 아니라, 일종의 무한이라는 유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은 유한을 하나의 계기로서 포괄하는 전체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이 신이기 위해서는, 신은 인간과 구별되어 떨어져 있는 어떠한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까지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이런 의미에 있어서 신과 인간은 동히 정신으로서 서로 공속하며, 따라서 종교는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이자 동시에 신 안에서 인간 자신에 대한 앎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앎과 신의 앎을 가능케 하는 정신은 따라서 불변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기운동, 즉 주관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통해 인간의 유한한 주관은 절대적 본질을 자신의 본질로 알게 되며, 이러한 절대적 본질 안에 인간의 자기의식은 포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신에 대한 자기의식 안에서 인간은 신을 알며, 인간의 종교적 의식 안에서 신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3) 이런 한에 있어 신이 신인 것은, 단지 신이 자기 자신을 아는 한에서 이지만, 이러한 신의 자기-의식은 인간 안에서의 자기의식인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종교를 자기 스스로를 아는 절대적인 신적 정신, 혹은 유한한 정신의 매개를 통한 신적 정신의 앎으로 특징지우고 있다. 4)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의 내용과 철학은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주장된다. 왜냐하면 철학 역시 종교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존재자를 자신의 대상으로 가지며, 신만이 전체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신을 전개하면서 종교를 드러내며, 종교는 자신을 전개하면서 철학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종교와 철학은 그 자체로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주장되는 것이다. 실제로 헤겔은, 철학이 곧 예배라고 말하기도 한다. 5)
이런 까닭에 종교와 철학의 차이는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형식에 놓여 있을 뿐이다. 종교는 표상의 형식을 지니며, 비록 그것이 사변적 사상을 포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상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상(das Bildliche)과 사상(das Gedankliche)사이에서 부유하며, 이 두가지를 혼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6)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종교의 내용은 진리일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는 통찰력을 지니지 못한 확신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통찰력은 철학에 의해 비로소 완성될수 있으며, 철학은 종교가 표상한 것을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7) 따라서 헤겔에 의하면 철학의 사유하는 자기의식을 통해서 종교는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철학은 그 자체로 종교이지만, 철학은 종교에 비해 정신의 더 완성된 산물이며, 철학만이 정신을 진실로 자유롭게 할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철학없이 존재할수 있지만, 철학은 종교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따라서 신앙의 본질은 철학에서 찾으려는 헤겔은 몇가지 신앙의 형태를 비철학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헤겔이 비철학적인 신앙 파악으로 지적한 몇가지를 살펴 보기로 한다.
4.2.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해석들
4.2.1.직접적인 앎
헤겔에 의하면 경험적인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이 신에 대하여 직접적인 앎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굳이 신을 믿는다는 유신론자 뿐 아니라. 신을 부정한다는 무신론자의 경우에도 그가 신을 부정한다는 바로 그러한 부정을 통해 신에 대한 일종의 직접적인 앎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종교인들 간의 문제 역시 신이 "있다"란 사실, 즉 신의 존재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어떠한 신인가에 단지 차이를 두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며, 그것도 직접적으로 알고 있다. 신에 대한 이러한 직접적인 앎을 야코비는 믿음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앎이야말로 신에 대한 믿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8) 이때 신에 대한 모든 확신은 인간 안에 있는 직접적인 앎에 근거한다. 헤겔은 이러한 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이 경험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가지고도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는 민족공동체를 역사상에서 볼수 있으며, 신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중에 비종교인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 민족 공동체가 직접적인 신 인식을 지니면서, 동시에 종교를 갖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그 민족 공동체를 둘러싼 자연과 역사, 그리고 그와 연관된 민족 공동체의 독특한 심성이나 기질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며 역사적으로 종교나 학문의 전파에 있어 특별히 종교적인 민족들이 있는 것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점을 염두에 둘 때 직접적이 신에 대한 앎과 종교의 관계는 단적인 연관성을 갖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직접적인 신에 대한 앎은 신이 있다라는 사실에 관계할 뿐, 그 신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아직 아무런 인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존재사실에만 관계할 뿐, 신의 존재내용에 관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 의하면 직접적인 앎에는 학문적으로 검증된 인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내용적인 규정성에 의해 파악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의 내용은 신이지만, 그 신은 일반적이고, 따라서 극소의 진리기준만을 지닐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진리기준의 매개된 앎, 즉 신에로 고양하는 사유와 자기규정에 대한 인식에 놓여 있는 것이다. 9)
직접적인 앎에 대한 헤겔의 또 다른 비판은, 이것에서는 단지 주관적인 것만이 우위를 차지하며, 따라서 객관적인 계기 자체가 주관에 의해 멸절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여기서는 신에 대한 앎보다는 자신에 대한 앎이 더 근원적인 비중을 갖게 되는 것이다. 10) 그런데 이렇게 주관에로의 소환은 신에 대한 진정한 인식일 수 없는 것이다.
4.2.2. 감정
두 번째로 헤겔이 지적하는 것은 신앙을 감정으로 파악하는 입장에 대해서이다. 헤겔에 의하면, 그와 동시대적인 야코비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철학은 모두 직접성에 머물고 있다는 결점을 지닌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 종교는 사유를 통해서는 파악될수 없으며, 단지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이라는 주관적이고 종교적인 감정을 통해서 접근될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에 대하여 주장될수는 있지만, 결코 인식될수는 없으며, 단지 신이 있다라는, 그의 존재만이 알려질수 있는 것이다. 11) 이런한에 있어 감정도 작접적 앎과 마찬가지로 주관성의 측면에 의존함을 알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헤겔에 의하면 비판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반면 그의 질문은, 실제로 감정으로부터 신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것이 완성될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헤겔은, 감정은 각각의 주관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규정적인 정서인 것이다 12)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의 주관성은, 자신 안에서 사태의 객관성이 파악되는 것을 방해한다. 내가 어떠한 감정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 내용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13) 감정 안에서 나와 나의대상은 구분되지 않으며, 감정의 내용은 완전히 우연적인 것으로 설정될 뿐이다.
물론 종교는 또한 감정적으로 느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종교가 단지 감정뿐 일때는, 그것은 모든 규정적인 내용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사유하는 정신이며, 신 역시 감정을 통해 느껴질 수 있지만, 신은 또한 동시에 인간의 최고의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그때마다 나의 것인, 그러한 자아의 사태인 것이다. 그렇기에 감정은 어떠한 궁극적 근거를 제시할수 없으며, 어떠한 것이 옳은지에 대하여 아무런 판단도 내릴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의 진리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내용에, 즉 사유를 통해 근거지워지는, 그러한 내용에 놓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종교적 감정이 진리의 기준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의 기준은 사유에 의해 내용적으로 충실해지고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4.2.3. 표상
헤겔이 지적하는 세 번째 문제점은 신앙을 감각적인 것과 연관된 표상으로 보는 경우이다. 우리는 느낌과 직관에 의해, 한편으로는 직관과, 다른 한편으로는 질료와 연관된 표상을 형상화한다. 이런 까닭에 표상은 비록 감각적 질료를 그 그내용으로 하지만, 표상은 그 질료 내용을 보편화의 규정안으로 이끌어 들인다. 즉 표상은 감각적인 것을 초감각적인 것으로 고양시킨다. 14) 따라서 표상 안에서 감정의 단순한 주관성이란 측면을 극복된다. 여기서 신은 인간에게 우선 보편적 규정성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표상의 내용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전적으로 환상적이고 상상적인 대상에 대한 표상을 가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전설이나 설화속에 등장하는 괴물들이나, 수 많은 각을 지닌 원 등의 표상이 그렇다. 그런데 헤겔에 의하면, 표상이 이러한 요소를 지닐 수 있는 까닭은, 표상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상 안에서 본질적인 내용은 사상의 형식으로 설정되지만, 그 내용은 아직 사상 자체로서 설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표상은, 자신이 파악하고자 하는 대상의 비규정성을 규정하기 위해, 아직도 감각적인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표상은 감각적인 것과 사상 사이를 부유하며, 그럼으로써 표상 안에서 각각의 규정들은 고립된 채 각각 머물며, 사상적으로 서로 연관되지 못하는 것이다. 즉 표상의 기본범주는 직접성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직접성 안에서 표상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연관성 안에 있는 내용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의 단순성 때문에 하나의 대상은 다른 대상의 내용과의 연관속에서 보여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적 표상은 단지 외면성이란 형식만을 지닐 뿐이다. 15) 따라서 종교적 진리의 과제는 표상을 넘어 표상에 대한 개념적이고, 사상적인 내용을 찾는데 놓여야 한다.
4.2.4. 반성으로서 사유
헤겔이 신앙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서 지적하는 네 번째는 신앙을 인간의 사유안에 한정시키는 경우이다. 물론 헤겔에 있어 신에 대한 진정한 개념은 사유에서 가능하다. 그에 의하면 단지 사유 안에서만, 그리고 사유를 위해서만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반성으로서의 사유는 아직도 단순한 관찰이라는 경험적 입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반성적 사유는 유한한 인간의 활동으로서 유한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은 그 본질에 있어 무한한 것으로 사유되지만 반성적 사유에서 무한자는 유한자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유한자는 한계 지워진 것으로 무한자에게 자신의 한계를 지니며, 무한자와 배타적으로 규정되어 진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때 무한자 역시 배타적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한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유한자와 무한자 양자는 모두 유한한 것으로 파악된다. 16) 이렇게 반성적 사유에서 사유된 유한자는 무한화된 유한자이다. 이로써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되며, 그 두 세계는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반성적 사유는 이원론에 머물게 되며, 그 대립구조는 극복되지 않는다. 칸트에 있어 당위와 같이 도달할수 없는 무한자라는 피안과 유한성의 끝없는 슬픔이란 두 세계에서 절대자는 인간에게는 단순한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신적 정신과 유한한 정신의 구체적인 종합은 완수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결점은 곧바로 객관성의 결여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단지 스스로를 절대자로 설정하는 유한한 주관성에 다름아니며, 그러한 유한한 자아가 추구하는 궁극적 동경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 있어 절대자는 이러한 두 세계의 종합, 즉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 가능하며, 우리는 헤겔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파악되는 신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4.3 신앙의 본질로서 철학(헤겔)
4.3.1. 즉자 - 대자 개념에 대하여
형식 논리학은 A=A라는 동일률에 대하여 모순률을 대립시킨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형식 논리학의 동일률은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 공허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반면에 헤겔은 변증법적 과정을 마치 그 자체안에 폐쇄된 씨앗의 단순성이 꽃과 열매라는 전개될 다양성을 산출하는 것과 같이 비유적으로 주장한다. 17) 그는, 단순히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전개되지 않고, 의식적으로 포착되지 않은 것을 단순히 즉자 존재라고 부른다. 즉자 존재는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것을 꿰뚫어 보는 관찰자에겐 이미 의식된 것이다. 이러한 관찰자에게 있어 즉자 존재는 더 이상 폐쇄적이고 비사유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때 즉자 존재(an sich)와 그를 위해(??fur ihn)라는 표현은 관찰하는 자와 관찰되는 것의 주체가 이중적으로 갈라져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fur uns) 파악되는 것은 즉자 존재 그 자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파악되는 대자 존재(??fur sich)는 그 자체로 파악된 즉자 존재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다. 이제 즉자 존재는 그 자체 안의 어두움에 머무는 것을 그치게 되며, 주체가 소박하게 대상을 대함으로써 의식없이 즉자적이라고 여겼던 것이, 주체를 위한 대자적인 것으로 의식되게 된다. 이렇게 즉자적인 것이 스스로의 즉자성을 주체를 통한 대자적인 것으로 의식하게 될 때, 이것을 가리켜 헤겔은 즉자-대자적이라고 부른다. 18) 따라서 이원론적으로 주체를 "위한"것과 단지 즉자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즉자-대자적인 것에서 지양된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 절대자는 자기 동일자이다. 그러면서도 형식논리적인 동일자가 아니라, 변증법적 동일자이기 위해 신은 이미 그 자체로 자신의 즉자 존재를 탈취해 나가 대자 존재로 자신을 전개시켜야만 한다. 그럼에도 신이 절대자이기 위해, 신의 대자 존재는 즉자 존재와 동일해야 하며, 그것은 신의 대자 존재가 즉자 존재에로 되돌아감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헤겔의 절대적 변증법은 단순히 앞으로(종말을 향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초에로 되돌아 가고 있는 진행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헤겔의 신론은 신의 즉자성 - 이것을 그는 죽어 있는 신으로 보았음 - 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은 이미 자신의 변증법적 과정을 완성한 즉자-대자적인 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신은 실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4.3.2. 실체로부터 주체로의 개념의 운동
헤겔에 있어 개념은 정신의 최상의 형식이며, 개념의 운동성은 순수한 사상의 영역 안에서의 정신의 운동성인 것이다. 개념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활동이며, 포착하는 행동성안에서 현실적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어떠한 대상을 포착하는 것은 자아가 그 대상을 자신에게 고유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19) 대상은 단지 자아를 위해서만 통찰되는 것이다. 능동적인 행동으로서 포착함은 대상을 설정된 존재자로 만들며, 이렇게 설정된 존재자로서 그것은 비로서 자신의 즉자-대자적인 본질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성은 주체로서 나의 행동성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 자체의 행동성이다. 따라서 개념은 더 이상 실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진리, 즉 주체로 변하는 것이다. 즉 헤겔의 경우 논리학에서 실체는 스스로 개념에로 극복된다. 우선 근원적으로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스스로 관계하는 부정성에 의해 촉발된다. 그러나 부정하는 실체가 단순한 것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실체에 대한 규정성에 있어 변증법적인 전도가 발생한다. 즉 우선적으로 실체는 설정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스스로의 부정성에 의해, 즉 그 자신인 동시에 타자인 그러한 자신의 부정성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규정된다. 실체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양측면의 내재적인 운동성이 비로서 즉자적 실체를 즉자-대자적인 실체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실체는 단지 설정된 존재로부터, 그리고 설정된 존재 안에서 스스로에로 되돌아 옴을 통해서만 절대적일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에로 되돌아 오는 운동을 통해 절대적 실체는 절대적 주체가 되며, 여기서 일면성은 극복되고, 구체적 이념으로서의 최고의 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20) 절대자로서 신에 대한 사유는, 단지 완성된 자기 스스로 포착함으로서만 가능하며, 즉자 대자적인 신은 더 이상 죽어 있는 즉자적 실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기 운동으로서 즉자 대자적인 주체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이 주체라는 것이, 곧 신이 자신의 실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실체성이 주체 안에서 고양된 형태로 보존된다는 것을 뜻한다.
4.3.3. 주체로서 신
헤겔에 의하면 절대자는 정신이며, 이것이야 말로 신에 대한 최고의 정의이다. 신은 영원히 스스로 자신과 동일한 본질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타자가 되며, 이러한 타자를 자기 자신으로 스스로 인식한다. 신은 단순히 영원한 정지(휴식)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을 도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우선적으로 신은 절대적 이념으로서 자신의 영원성 안에, 즉 세계의 창조전에, 세계 밖에 머문다. 이렇게 신은 사상 안에 머물며, 이것은 그가 영원히 자신의 존재안에, 자신의 존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이때 신은 직접성 그 자체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밖에 아무런 근거도 갖지 않으며, 이러한 상태를 헤겔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보고 있다. 21) 그러나 신은 스스로 자신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에, 그는 자신을 자신의 대상으로 만들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와의 차이성을 드러 내지만, 동시에 이러한 차이성을 지양하고 자기 스스로이기를 사랑함으로써 자기 스스로와 동일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영원한 이념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뜻하며, 차이성은 단지 자기 스스로에의 사랑의 유희로서, 이를 통해 신은 스스로 세계의 창조주가 된다. 22)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절대 정신이 아니라, 단지 죽은 추상성에 불과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이념의 타자는 현실적으로 타자의 규정을 지녀야만 한다. 신은 타자를 자유로운 것으로, 즉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것이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인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로서 세계는 신의 타자이면서 동시에 상대적 독자성을 지니기에, 그것은 신에게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지만, 다른 한편 그 자체로 경험적인 실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세계 창조의 행위는 즉자적으로 자기 스스로 안에서 신의 이념의 판단과 동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차이를 지닌다. 왜냐하면 창조행위를 통해 영원한 아들이 비로소 사실적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23) 물론 이 말은, 아들이 단지 세계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 오히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신의 자기 내적인 자기 운동 안에서의 한 계기로서, 즉 내적인 삼위일체적인 영역 안에서의 계기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신의 외화의 계기로 파악됨으로써 여기서 신은 아들 안에서 유한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점이 헤겔에 대한 비판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헤겔은 명확한 구별없이 두가지 상이한 변증법적 운동, 즉 신의 자신 안에서의 내적인 변증법과 신과 인간 사이의 외적인 변증법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쨋든 헤겔의 의도는 이원론적으로 죽어있는 실체로서의 신으로부터 살아있는 신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수 있으며, 따라서 그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신이 변증법적인 운동을 하며, 그러한 운동속에서 비로서 자신을 신으로서 드러낼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위의 문제점을 하나의 질문으로 열어 두더라고 헤겔의 중요성은 충분히 평가될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신이 창조주만으로 머무는 것을 강력히 거부한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게 아버지의 나라가 아들의 나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신의 나라로 전이된다. 헤겔에 의하면 신이 단지 창조주로서만 규정된다면, 그의 행동성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 옴이 없이 진행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창조의 산물은 그 자신과 전적인 타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세계의 창조를 신의 자기현시, 자기계시로 파악함으로써, 신이 창조한 것이 곧 바로 신 자신임을 명확히 한다. 24) 이로써 절대정신은 이념과 세계의 구체적 종합임이 드러난다. 세계는 신 자신의 결과이고, 신 자신은 이러한 세계로부터 다시 자기 스스로에로 되돌아 오는 이념인 것이다. 이로써 신 개념은 자기 자신과 동일성을 회복하게 되는데, 이때 신의 동일성은 형식 논리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부정성의 부정성으로서의 동일성인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삼위일체론은 그의 사유의 방법론에 비추어 필연적이다. 그는 신의 인격성을 신 자신의 확실성의 무한한 주체성, 즉 절대적 주체성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헤겔의 신론에 의하면 신이 단지 정립에 머문다면, 그것은 죽은 신에 불과하고, 신이 정립과 반정립에 머문다면, 그때 우리는 신 안에서 피할수 없는 이원론에 봉착하게 된다. 단지 신을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으로 봄으로써, 그때 신은 우주의 창조적 원리로서 창조주이며, 동시에 구원자이고 완성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헤겔의 신론에 의하면 결국 신은 인간의 의식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의식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의 의식은 인간 안에서의 신의 자기의식으로 끝맺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의 자기 의식을 헤겔은 인간 안에 있는 종교적 자기의식을 통해 도달할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까닭을 그는 신과 인간을 동히 정신으로 파악한데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결과를 낳게 된다. 즉 정신을 통한 신과 주어는 신적 술어에 의해,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적 술어에 의해 또 다시 지양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이며, 이것은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철학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지적될수 있는 것은, 신적 술어와 동일성을 갖는 인간적 술어는, 엄밀히 말해, 이미 인간적 술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는 절대 정신의 거대한 전체속에 용해됨으로써 구체적 실존적 인간과 신의 관계는 하나의 계기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현상을 둘러 볼때, 신앙이 필요하고 유지되는 것은 실존적 신앙인이 단지 신앙의 계기가 아니라, 신앙의 주체임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신앙이 단지 전체를 위한 하나의 계기가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를 잇는 절대적 관계임을 살펴 보고자 한다.
5. 키에르케고르의 글쓰기 방식의 의미
키에르케고르가 헤겔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헤겔이 진리를 전체에서 찾은데 반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개체적 단독자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강조되는 것이 "나"라는 존재자에 놓여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이때 "나"라는 존재자는 전체 중 하나의 계기가 아니라, 유일회적이고, 고유한 "나"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즉 그에 있어서 "나"없는 전체, "나"없는 진리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전체의 계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하고 유일한 "나"는 어떠한 전체를 이루는 체계에도 적합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나타낸다. 또한 "나"는 관념론에서 나타나듯이 불변적 실체도 아니며, 개념도 아니고, 따라서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식행위나 인식의 양이 아니라, 내면적 결단에 놓이게 됨으로써 키에르케고르는 언제나 움직이고 완결되지 않으며, 독자적인 자기활동을 행하는 "나"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표현할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즉 그는 시간 안에서 부단히 결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실존을 표현해야할 과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려운 점은 "나"가 모든 각각의 인간에 있어서 서로 상이하며, 단지 각각의 자신에게만 충실하다는 점에서 실존에 대한 표현은 직접적인 실존의 내용을 다룰수 없다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실존은 각각의 고유하고 유일회적인, 따라서 서로 상이한 실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실존을 가능케 하는 상황이 드러나는 곳인 세계 역시 더 이상 조화로운 코스모스가 아니며, 지양을 통해 극복될수 있는 모순의 장도 아니기 때문에 상황의 내용을 표현하는 일 역시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존재하지 않고, 역사가 논리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즉 헤겔과 같이 역사가 절대정신의 자기 스스로에로 돌아옴 이라는 완결된 역사가 아닌바에야, 이러한 역사는 연속적일수 없으며,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과 역사, 세계안에 있는 고유한 "나"를 표현해야만 하는 과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인의 고유한 사적인 실존을 다루는 키에르케고르 입장에서는 "폐쇄된 이론"으로서의 "체계"를 전개시킬수 없다. 왜냐하면 실존은 원리적으로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행위이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실존을 짊어져야 하기에, 이러한 실존을 다루는 이론은 "열린 이론"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25)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표현할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 가능한가? 이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간접적인 글쓰기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간접적 글쓰기란 글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내용을 보편적이고, 개념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의도하는 내용에로 이끌수 있는 방법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26) 이것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도 같이 어떠한 사태를 추구함에 있어, 그러한 사태에 대한 보편적 내용과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에로 이끌려 갈수 있도록 대화의 도정을 이끄는 방식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대화자 사이에 이미 놓여있는 전제와 권위를 제거하는 일이다. 예를들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유일한 전제라고 한다면 단지 무지의 지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이야말로 각각의 개인을 사태에로 이끄는 방식이라 할수 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적 산파술에 더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책을 출판함에 있어 의도적으로 가명을 사용하고 있다. 즉 그는 철학적 단편에서는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로, 반복에서는 콘스탄티아 콘스탄티누스로, 공포와 전율에서는 요하네스 드 질렌티오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안티 클리마쿠스로, 그외에 비길리우스 하우프니엔시스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낯선 행적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가 낯선 이름으로 알려지길 원해서, 혹은 기존의 기독교단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우려해서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러한 작품들이 키에르케고르의 작품들이라는 것이 곧바로 알려졌다는 사실에서 부정될수 있으며, 또한 그가 어떠한 고정된 가명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또 다른 의도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다양한 가명들을 통해, 저자와 독자로부터의 모든 선입견을 제거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아야한다. 선입견은 요즈음 딜타이나 하이데거, 가다머등에 의해 해석학의 긍정적인 요소로 파악되고 있지만, 이러한 선입견은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이미 기존의 전통이 하나의 이데롤로기적 요소를 지니는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대답을 제시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그가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기독교 현상과 헤겔 철학적인 선입견으로부터 독자를 자유롭게 하려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그의 노력은 저자와 독자간에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독자와 저자, 그리고 텍스트간의 동일성을 파괴하려는 노력으로 볼수 있다. 27) 즉 키에르케고르의 해석학적 입장은 저자와 텍스트, 그리고 독자가 상호간에 차이로서 흩어져, 각자 스스로의 고유한 능력에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키에르케고르와 그의 저작으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선입견을 지닌 독자라는 해석학적 도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위해 그는 허구의 저자, 그리고 그러한 저자와 독자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텍스트, 그리고 자유로운 개개의 실존적 독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감정이입적인 해석이나, 저자와 독자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텍스트, 그리고 자유로운 개개의 실존적 독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감정이입적인 해석이나, 저자의 심리상태에 대한 역추구와 그를 통해 저자의 심리(의도)의 재구성이란 해석학적 방법을 거부하며, 또한 텍스트 자체로부터 저자와 구별되는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 또한 거부한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르에 있어 기존의 전통적 세계와 인간은 그에 의해 부정되어야 할 요소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원하는 것은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경우와 같이 텍스트 자체가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즉 텍스트의 자율성 역시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그에 의하면 텍스트는 단지 해석(그의 경우 비판)을 통해 각각의 독자자신의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텍스트가 자체의 자율성을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텍스트는 독자가 독자 자신이도록 이끄는 방식에 불과하며, 따라서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독자 자신의 텍스트가 되든가, 혹은 거부되든가 하는 양자택일의 경우만을 갖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그 자체의 자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저자의 텍스트로 결단되는데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해석학적 관심은 독자가 텍스트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가 독자에 의해 독자 자신의 고유한 텍스트로 실존화되는데 놓여 있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독자는 단지 텍스트를 읽을 뿐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를 살아야 하는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저자의 자율성도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엔, 저자의 자율성이야말로 독자의 자율성을 해치는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명을 사용했다는 다소 낯설고, 별의미없어 보이는 행위는, 실제에 있어 그의 철학적 입장 전체를 드러내는 해석학적 표현이라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키에르케고르가 의도했던 독자의 모습, 즉 각각의 개별적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 보기로 한다.
6. 인간의 본질로서 실존
키에르케고르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학문적 분위기의 영향도 있다. 그러한 요소로서 낭만주의를 들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동일성과 분열성이란 심각한 이중적 위기에 처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8) 한편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기 위해 고향적이고 자기근거적인 자신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무한에로의 끝없는 동경에 빠져 있는 자로서, 이것은 고향으로부터의 무한한 탈출이며, 따라서 혼돈을 포함하는 동경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에의 추구는 자신에로의 무한한 고양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기상실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 긍정은 동시에 자기희생을 포괄하는 동경인 것이다. 낭만적 자기비판은 이러한 궁핍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적 환상을 통하여 포괄자를 추구하지만, 이러한 포괄자는 동시에 모든 것을 용해시켜 버리는 거대한 잠과 같은 모습을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잠은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잊게 하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어야 하고 자신의 고유성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자유를 필연성에서 찾을수 있는 고유한 당위성에의 고양이어야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자기분열에의 불안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자신의 자아는 불안과 절망, 회의에 사로잡힌 자아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의 이러한 분열상은 어디서 연원하는가?
키에르케고르 이전의 철학은 대부분 자아의 본질을 순수자아, 혹은 선험적 자아에서 찾았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변하며, 자기 동일성을 지니는 실체로서 파악되어 왔다. 혹은 헤겔과 같이 살아있는 주체로서 파악하는 경우에도 의식의 절대성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의식의 내용은 점차 절대의식으로 확대되어 가지만, 의식의 형식 자체는 동일한 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낭만주의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본질을 자기 동일적 이성에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유와 의지, 감정, 그리고 활동의 통일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 고요한 평안을 유지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자신 안에 끊임없는 다양한 요소들의 충동과 갈등을 내포하며, 그 어떠한 상위적인, 즉 류적인 통일가능성도 갖지 못한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은 사유와 의지, 감정 활동이 되섞여 관계하는 관계자이며, 변화하는 상황적 세계와 동료인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과 관계하는 관계자이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이 될 가능성을 지니기에, 이러한 자기는 존재와 당위, 현실성과 비현실성, 영혼과 육체라는 대립 속에서 자기를 지양시킬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존재의 최고의 형식은 분열성과 회의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더 이상 헤겔과 같이 이성의 자기반성을 통해 지양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상이한 요소를 자신 안에 지니는 혼돈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혼돈은 자기 반성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대립의 지양은 헤겔과 같이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다시 획득함(Wiederholung)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로의 운동으로 본 점에서는 헤겔과 동일하나, 글 운동을 매개를 통한 의식의 변증법이 아니라, 자유속에서 자신의 결단으로 파악한 것이다. 또한 그에게 역사는 지양을 통한 발전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상황을 갖는 역사속에서 단독자의 결단을 뜻하기에 역사는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든지 비약을 감행하는 장소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와 헤겔의 차이점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명확히 볼수 있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이다. 그러나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는 스스로 자기 스스로에 관계하는 그러한 관계에 있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관계가 자기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그러한 것이다." 29)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정신으로 파악하는 점에서 헤겔과 일치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운동으로 보는 것도 일치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헤겔이 그 운동을 정, 반,합이라는 이중적 운동에서 파악한데 반해, 키에르케고르는 삼중적 운동, 즉 헤겔적인 이중적 운동을 자신과의 관계로 다시 관계지우는 운동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30) 그리고 이러한 점이 필연적인 이유는, 그의 경우 인간은 무-관심적인 자기반성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의 관심을 갖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에 관심(Interesse)을 가지며, 따라서 중간적인 존재(Inter-esse)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고유한 존재라는 본래성은 비본래성으로부터 지양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에로의 결단을 통해 가능해지며, 이것은 지양된 존재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존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가 자기와 상이한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존재인 한에 있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다시 길어내는 결단인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은 헤겔과 같이 종합이 아니라, 종합을 포함하는 관계의 선택이며, 이 선택을 통해 관계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으로, 따라서 이러한 자기는 이론적 자기반성을 통해 매개될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르가 파악하는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지 못한, 단지 그러한 관계를 다시 관계해야 하는 인간이며,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그는 역설이라 부른다. 역설은 관계의 역설로서, 그것은 실존의 역설과 상황의 역설을 동시에 포괄한다. 이런 한에 있어 관계를 관계하는 자기 자신은 잘못된 관계에 빠져들수 있으며, 이러한 잘못된 관계를 그는 절망이라 부른다: 절망은 "자신이 자기에게 관계하는 종합이라는 관계에 있어서의 잘못된 관계(Missverhaeltnis)이다. 그러나 종합 자체는 잘못된 관계가 아니라 단순한 가능성이다" 31) 절망은 관계를 관계하는데서 생기는 것이기에, 그것은 이론적인 자기반성을 통해 파악될 수 없으며, 인간 존재안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절망은 인간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하며, 실존의 올바른 관계의 선택인 결단은 신앙이라는 형식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실존의 본질은 역설에 처한 인간의 신앙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7. 신앙과 절망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처한 심각한 실존적 위험성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실존적 병으로서, 물리적 죽음과는 전적으로 상이한 개념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실존의 절망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실존의 한계를 제시하며, 또한 그 극복을 가능케 하는 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한에 있어 절망은 이미 이중적이며, 그 자체로 역설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수 있다. 절망은 그러한 절망을 통해 인간을 그의 소외된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에로 비약을 가능케 하지만, 또한 절망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비본래성에 더욱 몰입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몰입은 이미 그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의 본질은 올바른 관계의 선택에 있기 때문이다. 절망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선택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종말이 곧 죽음이고 동시에 죽음이 종말인 상태"로 이끄는 것이다. 32)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 절망은, 그것이 물리적 죽음이 아닌한에 있어, 이미 죽음에 이른 병이면서도, 그 병으로 죽을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삶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이끈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실존적 죽음을 죽으면서도 결코 죽을수도 없는, 따라서 죽음을 죽는 그러한 병인것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는, 사람들은 삶을 희구한다. 그러나 죽음보다 한층 무서운 위험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죽음을 원한다. 이리하여 죽음이 절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커졌을 때, 절망은 그 경우에 있어서는 결단코 죽을수가 없는, 소망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33) 그런데 이러한 절망은 무엇이 진정으로 위험한 것인지를 지시함으로써 그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일반적인 자연인은 무엇이 무서운 것인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무서워 할것이 못되는 것을 무서워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반면에 절망은 그보다 한층 무서워 해야할 것이 무엇임을 지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르의 해석학은 전적인 감정의 역설에서 그 분기점을 갖는다. 즉 다양한 요소를 지닌 인간이기에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진정한 해석학적 이해는 대상이나 자신에 대한 의미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에의 이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는 해석의 진리성을 위해 순수자아에로의 환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역설적 순간에 드러나는 근본적인 이해로부터 실존이 자신의 고유성으로 환원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본래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비본래성과 본래성의 역설 속에서 실존은 자기 자신의 존재로 환원되는 것이다. 즉 그의 해석학적 과정은 훗설적인 방식, 즉 판단중지와 그를 통한 자아의 환원, 그리고 본래적인 구성이란 순서를 지니지 않고, 오히려 절망의 역설적 순간에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에로의 환원과 구성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절망과 양심, 그리고 결단의 관계는 논리적이거나 시간적인 선후관계로 파악되어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절망만이 양심을 일깨울수 있으며, 양심에 의해 절망은 절망의 비본래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양심과 결단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양심은 결단을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결단을 통해서만 양심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이 관계들은 역설적 순간의 관계로 보아야 하며, 이때 절망은 자유로 드러나고, 이러한 자유의 원천은 비약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들은 분명한 역설이며, 따라서 그의 철학은 역설에 기반을 둔 역설의 해석학이라고 볼수 있다.
8. 역설과 신앙의 본질
만일 키에르케고르가 보고 있는 실존과 그것을 둘러싼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고, 역설적이라면, 과연 실존의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수 있는가? 혹은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전달될수 있는가?라는 해석학적인 문제가 제시될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즉 "진리가 가르쳐져야 하는 것이라면, 진리가 아직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진리는 탐구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에 따르는 난제는 또한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만일 진리를 인간이 이미 알고 있다면, 그러한 진리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며, 반대로 인간이 진리를 모르고 있다면, 그러한 진리를 인간은 찾을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을 자신이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렇다면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최고의 진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무지의 지, 즉 비진리의 진리에 한정될 것이다. 진리란, 인간이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진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에 한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외에 어떠한 가능성이 존재할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그에 의하면 새로운 진리의 발견 가능성은 인간이 진리를 이해할수 있는 조건이 주어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할수 있는 조건이란, 인간이 역설적 실존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역설적인 조건을 뜻한다. 왜냐하면 진리란 단순히 가르쳐 질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실존의 변화를 통해 비로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기가 <사랑한 것>에 알맞는 만큼 위대한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자신에 의하여 위대한 것이며, 타인을 사랑한 자는 그 헌신을 통해?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신을 사랑한 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것이다." 35)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진리 자체가 있어서, 그러한 즉자적 진리가 실존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통해 진리는 비로서 진리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이미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도 절망의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 알수 있다. 그렇다면 진리를 가능케 하는 역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역설이 어떻게 진리에로 이르게 할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의 구체적인 예로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고 있다. 36) 그에게 주어진 역설은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죽이라는 신의 명령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단지 어떠한 한 인간, 특히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행위가 모두 실존적 역설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37) 오히려 윤리적인 면에서 이러한 경우를 고찰할때는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날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이스 문학의 비극적 영웅의 경우가 그렇다. 호머에 의하면 아가멤논이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 납치된 헬레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혹은 이외에도 범죄를 저지른 아들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는 아버지의 모습도 동일한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가 실존적 역설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은, 이들의 결정이 비록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그 결정은 보편성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더 높은 가치를 위해 더 낮은 가치를 희생하는 것은 때때로, 개인에게는 비극이지만, 전체로서는 바람직한 일로 평가되고, 심지어 숭앙되는 경우를 볼수 있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경우의 단계를 윤리적 차원이라 부른다. 즉 윤리적 차원이란 개체가 자신의 목적을 보편 속에 표현하고, 그의 독자성을 지양하여 보편적인 것이 되는 단계를 뜻한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에 있어 보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독자로서의 실존인 것이며, 개체가 보편에 의해 지양되는 것은, 곧 진리의 포기와 상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때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아브라함의 예는 윤리적 단계의 비극을 넘어서 실존적인 역설의 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역설은 비극과 달리 해결을 위한 보편적인 진리를 갖지 않으며, 자기 개인의 실존적 결단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다는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예를 계속하면, 이삭은 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아들이며 - 임의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그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창하게 되리라는 약속의 아들-, 따라서 이삭을 죽이라는 신의 명령은 이삭을 통해 자손을 번창시키겠다는 신 자신의 약속을 파기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의 역설은 신이 신 자신을 부정하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역설이며, 인간 아브라함으로서는 신과 아들 어느것도 포기할 수 없는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은 인간적인 역설과 신적인 역설을 동시에 내포하는 극단적인 역설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몇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본다. 첫째로, 신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는 경우를 들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신의 약속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것을 간과하고, 즉 신의 약속도 어떠한 방식으로 지켜질 것이라고 믿고, 신의 명령을 따른다 하더라도, 이러한 선택은 실존의 진리를 포기하는 선택으로 볼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유한자로서 인간이 무한자인 신에게 전적으로 용해되는 경우로서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유한성에 절망하는 형태로 보고있으며, 반면에 실존의 진리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 실존은 철저하게 무한 속에 용해됨으로써 자신을 상실하는 경우로 볼수 있다.
둘째 해결방식으로서, 아브라함이 아들 대신 자신을 희생물로, 즉 자살하는 경우를 들고 있다. 38) 그러나 이 경우, 아브라함은 신이 전능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무한성에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는 경우로 보고 있다. 즉 이러한 행위를 통해 아브라함은 스스로 신과의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신의 명령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응답은 오히려 신과의 관계의 단절이란 모순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을 통해 실존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결과는 단순한 살인 행위뿐인 것이다. 단지 이삭에 대한 자신의 살인대신, 신에 의한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실만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두 경우는 모두 해결방식으로 채택될수 없다. 이 두 경우는 윤리적인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때 아브라함이 자신이 유혹에 빠졌다고 생각했다면,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을 테고,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면 비극적 보편성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성마저도 간과한다면, 그러한 행위의 결과는 어떤 미치광이가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잔인한 사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경우는 동히 아브라함의 절망이라는 형태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이삭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에게 아브라함의 살인행위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해될수 없는 것이며 - 왜냐하면 윤리적으로 보편적인 진리를 갖지 않기에 -, 따라서 이 행위는 결과적으로 이삭을 절망에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의 절망 - 그가 모든 기쁨을 상실한 노인으로 되어버리는 경우-, 과 이삭의 절망 - 신앙을 잃어 버리는 경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외에 어떠한 해결방식이 가능할까? 이 가능성을 키에르케고르는 보편이 아닌 신과 단독자로서의 실존간의, 즉 단 둘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엔 아무런 윤리적 진리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실존적 단독자도, 신 자신도 부정되어서는 않된다. 위의 두 경우는 모두 - 그것이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 두 사람이 신앙을 상실한 것으로 끝맺는다.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두 사람 모두 신앙을 잃지 않으면서 해결될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해석학적 방법론이 이중적 변증법이 아니라, 삼중적 변증법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중적 변증법은 정립과 반정립이란 모순을 지양함으로 발전적으로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정립과 비정립을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 지니는 실존과, 또한 그러한 상황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자는 그러한 상황과 관계를 맺을 수도, 혹은 잘못된 관계에 들어설 수도 있으며, 또한 그러한 각각의 상황과 관계를 맺는 자신의 존재를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떠한 실존자가 자신의 실존을 결단함에 있어, 그리고 어떠한 상황을 받아들임에 있어, 만약 보편적인 진리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면, 자신과 상황의 선택에 대하여, 그것이 진리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단독자로서 개체는 어디서 자신의 선택이 진리라는 권리를 정당하게 확신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앞의 예를 계속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 성서설화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신의 명령에 의해 그 옆에 있는 동물을 죽임으로써 끝 맺는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삼아야 되는 것은, 아브라함은 일단 보편적인 진리 없이 이삭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고, 그러한 죽임의 사건이 철회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다시 찾았을 때, 당황하거나, 주저않고, 소위 말하는 양심의 가책없이 기뻐할 수 있으려면, 그는 이삭을 진정으로 사랑 했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비록 신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신을 "믿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39) 이때 그는 신을 사랑하였을수는 있지만 신을 믿지 않음으로써, 결국 자기자신을 반영한 것이며, 따라서 그는 결국 절망에 빠져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그가 신을 믿었다면 그것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40) 그런데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을 신앙이라 한다면, 신앙의 본질은 놀랍게도 역설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한 것은 바로 역설이라는 부조리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조리가 힘일수 있는 까닭은 실존의 본질이 역설이고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본질은 오성이나 변증법적 지양이 아니라, 역설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역설은 신과 단독자 사이에서 실존의 무한한 체념을 요구하며,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무한한 체념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의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 41) 으로 파악하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감정의 직접적인 충동이 아니고, 또한 사변적 반성이 아니며, 단지 실존의 역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을 통해 잃어버리는 것이 얻는 것임을 진리로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체념한 것)을 다시 얻는 것"이며, 따라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서 이삭을 체념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이삭을 얻은 것" 42)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의 본질이 이렇게 역설인 까닭은 비단 실존의 역설에 의거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 자신의 역설에서 비롯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신은 헤겔과 같이 인간의 종교적 의식을 통한 신의 자기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키에르케고르의 신은 절재적으로 고양된 전체로서의 의식이 아니라, 실존적 단독자와 관계하는 신이다. 그러기 위해서 신은 먼저 인간이 스스로 비진리에 빠져 있음을 알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에의 능력은 전적으로 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신과 인간 사이에는 헤겔의 경우와 같이 어떠한 연속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전적으로 초월하는 신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신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수 있는 것은 신의 역설에서 비롯된다. 신은 인간에게 진리에의 능력을 먼저 줌으로써만 인간과의 관계에 들어갈수 있는데, 이때 진리에의 능력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철저히 죄인이라는 진리인 것이다. 신의 진리는 인간에 대한 신의 고발에서부터 시작된다. 신과의 만남에서 맨 먼저 인간은 자신이 진리에 들어 섰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비진리라는 앎은 동시에 진리의 길로 들어섬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에의 길은 바로 실존적 단독자 자신의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집단적으로나, 전체적으론 불가능 한 것이다. 비진리로부터 진리에로의 이행은 철저하게 단독자로서만 가능하며, 이때 인간은 신앞에 단독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신이 진정한 진리에의 선생이기 위해서는, 신은 스스로 진리를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의 결단을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이라고 한다. 신은 그 본질상 사랑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사랑은 신의 자기내부에서의 사랑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으로서 신의 결단은 이미 시간 이전, 즉 영원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신은 사랑이며, 또한 진리에의 사랑이기에 이 세상으로 내려오기를 영원히 결단하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이 원인이었고, 그가 신이라면, 그의 목적도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43) 그리고 이렇게 신의 영원한 사랑이 시간 안에서 드러날 때, 그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순간이라고 한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단독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때 순간이란 시간의 기계적 점으로서의 찰라가 아니라, 인간과 신의 영원한 차이가 역설적으로 연결되는 존재론적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가능하려면, 신은 스스로의 사랑을 불행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44)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과 무한한 차이를 지니는 불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등함에 이르기 위해 신은, 헤겔과 같이, 인간의 고양된 의식이란 방식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는 방식을 택한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을 높이는 방식을 통해 동등성에 이르는 방식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이때 높아진 인간은 스스로 만족할수 있지만, 이것은 인간을 모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상실한 인간이기에 그러한 인간과의 만남이란 또 하나의 슬픔인 것이다. 따라서 신은 자신을 낮춤으로서 인간과 동등해지기를 결단하지만, 이러한 신의 사랑은 신의 수난으로 드러나며, 이러한 수난을 통해 신은 자신의 사랑의 무한함을 인간에게 보이는 것이며, 이러한 무한한 사랑과 수난이라는 역설을 통해 신은 신으로서, 그리고 인간은 단독적 실존자로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을 만나기 위해 신앙은 이러한 역설, 즉 신이 수난을 결단하고, 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신이 최고의 존재로서, 전능자로서 나타났다면, 신앙이란 왜 필요한 것일까? 이와 달리 인간으로서 신의 역설을 만나게 될때 비로소 인간에게 신앙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역설을 역설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신앙은 신의 진리와 죄, 신의 사랑과 수난, 절망과 비약, 자기부정과 자기긍정(회심), 신과 인간의 무한한 차이와 동등성을 통한 관계의 회복이란 역설, 결론적으로 신앙은 자신의 실존의 역설과 신의 역설,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의 역설, 영원과 시간의 역설을 역설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9. 맺는말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대사회의 특징으로서 이중적인 존재결여 현상을 들고 있다. 그는 횔덜린의 시를 해석하면서 현대사회의 특징을, 옛신이 떠나버리고 새로운 신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중적인 결핍의 시대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많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종교다원주의가 주장되는 탈현대적 시대에서 신에 대한 이전의 해석들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그렇다고 새로운 해석들이 아직 보여지지 않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대사회가 신의 임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새로운 신의 도래는 그러한 신이 머물수 있는 신적 공간이 선행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근대 이후 진리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즉 근대 이후 진리는 확실성으로 파악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확실성은 현대에 이르러 좀더 실증적인 확실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영향으로 현대의 많은 종교현상도 존재론적인 면 보다는 존재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것을 볼수 있다. 이러한 종교현상은 현 사회에서 좀 더 실증적인 확실함을 제시하거나, 약속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볼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인 확실성은 필연적으로 신앙의 실증적 확실성이란 모습을 요구하는 것을 볼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실증적 형태는 매우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신을 실증적 최고 존재자로 만들 위험성을 지니며, 이럼으로써 가뜩이나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신이 임재할 수 있는 자리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유럽의 거대한 성당이나, 우리나라의 웅장한 절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다. 반바지나 가벼운 옷차림에 사진기를 들고, 정신없이 떠들며 호기심에 들떠 있는 여행자들로 가득찬 성당이나 절. 그곳에서 우린 더 이상 신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신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론적인 - 실증적인 공간이 아니라 - 장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증적 공간에 더 이상 신은 머물지 않으며, 그러한 종교적 건축물은 신이 떠나버리고만 단순한 건축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