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MER - 2009년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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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시대, 믿는자여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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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_ 노동과 세계 이명익
CCMER - 47 개재
‘이명박만 사라진다면 실추된 공동체적 가치가 살아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약자에 대한 배려, 기회의 균등, 대화와 타협의 문화. 이런 것들이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이다.
사실 이명박 시대에 이르러 한국 상류층은‘밑바닥’을 거의 다 드러냈다. 지난 10년 정권 시절을‘잃어버린 세월’로 규정할 때부터 알아봤다. 그들의 10년은, 실은, ‘굶주린 세월’이었다. 바닥 층이 쥔 변변치 않은 재화마저‘투자활성화’란 이름으로 편취했다. 이 와중에‘노블레스 오블리제’같은 말은 어디에 두고 내렸는지 잊은 지 오래이다. 그러나 부자 감세, 과도한 규제 해제, 부동산 거품 유지를 가능케 했던 몸통은 따로 있었다. 강남 알부자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가진 자들은 게다가, 거울도 안 본다.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논문 표절, 병역 부당 면제 같은 도덕적 하자가 다분한 처지에도, 명예마저 쥔다며 감히 공직 진출까지 꿈꿨던 것이다. ‘그 진상에, 공직 맡을 엄두가 나나?’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면 각본이라도 짠 듯‘오해다’,‘ 좌파의 공세이다’라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는다. 졸렬한 방패를 내세우며 자리 챙기기에 여념이 없던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도 14번의‘별’을 달 뻔 한 이명박 대통령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청와대에 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한국교회가, 나름, 체면 생각을 한다면, 장로인 그를‘리콜’해야 마땅하다. 남북문제, 노사관계, 환경파괴, 민주주의의 가치 모두 헝클어 놓은 점, 어려운 건 침묵하고, 만만한 건 공권력 앞세워 반대편 짓밟아 뜻으로 관철하는 행태에다 부자 몫 챙기기까지. 이런 모든 악수(惡手), 그래, 다 차치하자. 미생물이 안 보인다며 답답해하는 그에게 뭘 더 바라겠나. 다만, ‘살겠다’며 망루에 올라간 이들을 코너로 몰아 결국 사지로 보내버린 용산 참사 사건에 대해 사과 한마디 안 하고
있는 점은 관용의 정도를 넘어선다.
종교와 담 쌓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일론 크리스천이라면 모를까. 시장 시절 서울을 통째로 봉헌하겠다고 했고, 입만 열면‘어머니의 기도’를 운운하기 바빴던 그다. 양심은, 이런 일이 있을 때 고통을 느끼라고 있는 것인데, 본인이 이 점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면, 그러니까 양심이 실종됐다면, 비로소 교회가 나서야 한다. 늦었더라도‘장로직 박탈’운운하며 사과를 종용해야 옳다.
물론 이렇게 할 한국교회라는 기대는 전혀 안 한다. 사실 총회, 노회, 교회라고 하는 곳이‘좋은 게 좋은 거’를 최상의 가치로 내건 동류집단 아닌가. 물론 이 조직 안에서도 간혹 소환, 재판, 권징, 책벌. 이런 무시무시한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 살벌한 어휘가 운위되는 시점은 교회 재산 같은 기득권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일 때뿐이다. 이렇게 자정능력이 제로에 가까운 한국교회가, 현직 대통령이자, ‘교회 기득권 사수’를 위해 당선되신 그 분에게‘징계’운운은커녕, 얼굴 한 번 찡그릴 수 있을까.
얘기를 원점으로 돌린다. 이명박 대통령만 사라지면 우리 사회의 모순,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피부적으로 느낄 만큼 개선될까.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드러난 도처의‘광기(狂氣)’에서 필자는 갈피를 잃었다. 평택시 내에서는 대다수가 노조의‘극렬 농성’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사실 노조의 그런 행태에‘아름답다’라 이야기할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화염병, 새총을 쏘고, 타이어를 태우고, 경찰을 폭행하면서도, 나름 투쟁의 정당성을 갖는 이유가 있다. ‘살기 위해서’싸우기 때문이다.
쌍용차 노조 투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또 <조선일보>는“한 600명(노조원) 살자고, 5000명(비해고 노동자) 죽이자는 얘기냐”라고 이야기한다. 그건 공장 밖에 얘기이고, 공장 안에서는, ‘우리 600명은 밖에 5000명을 위해 죽어줘야 한다’로 인식한다. 필자가 분노 하는 부분은, 중국의 먹튀 자본에게 쌍용차를 팔아넘긴 자들, 상황이 이지경이 되도록 팔짱끼고 나 몰라라 하면서 경찰만 보낸 정부는 이 논란의 중심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이들이 적시에 책임 있는 자세를 취했더라면, 노조원이나 사측 편에 선 비노조원이나, 2009년 봄, 여름을 이 평택 공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보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왜 노동자만 책임져야 하는데? 노동자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사건 발생 이후 이틀째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2009년 쌍용차 공장에서 노조원 때려잡은 경찰들. 이들 때문이다. 포박돼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노조원에게 분풀이 차원에서 집단으로 짓밟고, 방패로 내리찍었다. ‘통제할 수 있는 집단, 경찰’이 말이다. 경찰 상층부는 이를 두고 뭐라 하던가. “그걸 어떻게 통제하나”는 반응이다. 그래서일까. 이튿날, ‘평택 폭도 진압 기념’명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들끼리 해맑게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노닌다. 죄책감이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자,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2009년 8월 쌍용자동차에서 진압한 경찰’, 영원히 잊지 않겠다. ‘사이비 인간’으로서 말이다.
또 하나 충격을 준 주체들이 있다. "도장2공장도 한방에 속전속결로 밀어붙여 끝장내세요", "그들은(농성 중인 노조원들)은 범법자! 중도 포기자(이탈자)는 케이블타이(한 번 묶이면 풀리지 않는 플라스틱 소재의 끈)로 묶어 경찰에 인계하자"고 주장한 이들이다. 쌍용차 비해고 직원들이 주축을 이룬 카페로 알려진‘쌍정모’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정말 이글을 쓴 이들이 비해고자 또는 비해고자 가족이라면 절망이다.
물론 한시 바삐 정상화로 가야할 길목을 가로막아 결과적으로 파산을 재촉하고 있는 노조, 답답하고 야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조도 또 비해고자의 바람도 결국은‘생존’아닌가. 노조의 방법이 틀릴 수 있다. 노조의 투쟁 방식이 과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비해고자의 노조 원망은‘나는 살아야 해’라는 이기주의의 속내를 여실히 드러낸다. ‘나이브한 먹물의 뭘 모르고 하는 소리’로 매도 돼도 좋다. 그러나 살아남을 자가 해고 대상자를 상대로‘너는 죽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리 관점을 달리해 따져 봐도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글을 갈음한다. 위기의 실존은 이명박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이 실존은‘수많은 도덕적 하자가 다분한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될 수있었던 힘’이었다. 이‘힘’은 무엇일까.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그릇된 이기적 물량주의였다. 그냥 물량주의도 문제인데, ‘이기적’이란 앞말까지 붙었다. 밑도 끝도 없이‘부자로 만들어준다’는, 허경영식 환상이다.
이기적 물량주의는 약자에 대한 배려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다. ‘같이 살자’는 손길 따위는 아예 부정하고 마는 비정함이다. 부동산 가격만 올려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파란당’을 찍어주는 맹목성이다. 광기의 표면화는 결국, 점증돼온 광기의 내면화의 완성 징표는 아닐까. ‘약자를 괴롭혀 사지로 몰자’는 이 엄혹함에 질리고 만다. 아니 질리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 이기적 물량주의의 근원을 제거하지 않는 한 제 2의 이명박, 제 3의 이명박이 언제든‘시대의 희망’이란 아이콘이 되어 출몰할 것이라는 또 다른 공포 또 한 이러하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나만 잘 먹고 잘 살자’식의 시대풍조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한국교회. 아무런 해법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
아니 이웃에 작은 교회 신자들까지 흡입하는 대형교회, 교회 성장의 기준을 신도 수, 헌금액수로 계산하는 목사 장로가 어디 한 둘이 던가.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린다’라는 말씀이 두려워지는 대목이다. 교회마저 광기에 동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폐타이어 연기 속에 서 있는 것만큼 이 나라의 앞날이 통 보이지 않는다.
ps 오장훈 주)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이책을 보는 듯하다.
푸코와 하버머스의 대립 같다.
결국 소통의 문제가 양극단을 더 크게 GAP을 벌여 놓았다. 결국 넘치는 지성에서 지성의 고갈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소통의 기준이 제각자 다르다는 것이다.